두 남여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으면서도 피아니스트라는 직업만큼이나 서로 닮은 꼴이다. 스필만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유대인 강제거주구역이었던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살아남은 20여 명의 유태인 중 하나였고, 에리카는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피아니스트>(2001)에서 그려진 가상 인물이다.
스필만의 처절했던 생존 이야기는 그의 자전적 회고록을 바탕으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 의하여 영화 <피아니스트>(2002)로 재현되었다. 동명의 이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시대배경을 하고 있음에도 놀랍도록 동질의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에서 스필만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잔혹하게 진행되는 폴란드 케토 한 가운데에서 가족 모두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홀로 살아남아 목숨을 연명한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어둠과 추위는 예술가 스필만에게는 너무 가혹했다. 스필만은 살기위해서 짐승처럼 굶주림과 싸운다.
전쟁앞에서도 초연한 피아니스트 스필만
스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죽음의 공포에 떨며 한 조각 빵조각으로 연명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동료들의 의로운 저항활동도 그에게는 무의미하다.
이 영화는 스필만의 동료들이 목숨을 건 저항활동으로 피 흘리며 쓰러져 가는 모습과 두려움으로 방안에 틀어밖혀 벌벌 떨고 있는 스필만의 모습을 자주 대비 시킨다. 많은 관객들은 그의 이런 모습에 인간적인 분노를 느꼈으리라.
저항운동이 진압되자 그는 "수 많은 목숨을 잃었을 뿐, 그 저항으로 무엇이 달라졌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동료에게 되묻는다. 스필만은 비굴하게나마 그가 살아 남는 것 외에는 정의로운 투쟁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반면 에리카는 어떤가? 그녀는 섹스하기 위하여 제자인 꽃미남 학생을 쫒아 다니고, 자동차 극장에서 타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오르가즘을 느끼며, 섹스샵에 들러 남들이 버린 휴지에서 정액 냄새를 맡으며 자위행위를 하는 것이 전부다.
에리카에게 현실 세계는 없어 보인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소리, 흑백의 피아노 음반이 공명해 내는 황홀한 음 외에는 관심이 없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성기를 면도칼로 긋는 자위행위를 시도하겠는가?
그녀는 미세한 음에 미쳐 있었고, 욕동을 부추기는 소리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에리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피아노의 음계가 발현하는 소리에 복종하는 일 외에는 없었다. 관객들은 그녀의 이런 변태적인 모습에 인간적인 분노를 느꼈으리라.
스필만과 에리카과 닮은, 동질이라는 의미는 둘다 피아노에만 매료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스필만은 안전가옥에 숨어지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픈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그 위험한 순간에도 음반 위에 손을 올리고 가상의 연주를 한다. 관객들이 저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할 정도다.
에리카가 현실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노처녀였다면, 스필만은 저항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숫총각이었다. 그들에게 의미있는 것은 피아니스트로서의 삶 뿐이었다. 나머지는 비굴해도 좋고 관객들에게 욕을 들어 먹어도 좋았다.
이것이 예술가들의 환영이자 초상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영화 <피아니스트>를 잔악했던 나치 학살을 온 세상에 알리는데 주력했으나, 이 영화는 오히려 예술가였던 한 피아니스트의 은밀한 욕망을 추적한 것으로 읽힌다.
전쟁이 끝나고 세련된 양복을 입고 미소를 머금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스필만의 얼굴은, 에리카가 클레머를 뒤로 두고 칼로 자신의 가슴을 자해하여 피를 흘리면서 콘서트홀을 빠져나오는 숏과 겹쳐진다.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는 제75회 아카데미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을 수상하였고, 제5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등 유수의 상을 휩쓸었다.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 역시 제54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여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을 했다. 수상기록으로만 보면 로만 폴란스키의 승리다.
피아노를 소재로 한 영화들
샤인 * 순수한 영혼은 상처받기 쉬운가
아마데우스 * 모차르트라는 천재성과 경합한다는 것
피아노 - 세상과 단절된 여인의 사랑
글루미 썬데이, 모계사회의 로망
음이 성적쾌락이다/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들
'차이나타운' 사건의 단초는 언제나 여자
사랑? 영화 <비터 문>을 보시오!
제목 피아니스트 The Pianist, 2002(평점 8.0)
장르 드라마, 전쟁 | 프랑스, 독일 | 148 분 | 개봉 2003.01.03 | 12세 관람가
감독 로만 폴란스키
배우 에드리언 브로디(블라디슬로프 스필만),
토마스 크레취만(빌름 호젠펠트)
장르 드라마, 전쟁 | 프랑스, 독일 | 148 분 | 개봉 2003.01.03 | 12세 관람가
감독 로만 폴란스키
배우 에드리언 브로디(블라디슬로프 스필만),
토마스 크레취만(빌름 호젠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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