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밤, 그것도 주말인 시월의 마지막 밤.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아니라도 오늘 같은 밤은 궁상떨기 안성맞춤이다. 컴퍼니에는 다 퇴근하고 아무도 없다. 저녁밥으로 어제는 라면, 오늘은 자짱면을 식당에서 혼자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궁상맞다.

박건호는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혹시 잊혀진 노래, '잊혀진 계절' 노래를 감상하실 분은 사브리나님 블로그 가기)라고 했던가. 딱 내처지인 것 같기도 한데, 난 이룰 수 없는 꿈조차도 없으니, 시월의 마지막 밤은 내 것이 아니던가.

오프라인에서 나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내 인간을 탓해야지 별 수는 없다. 그러나 더럽다. 더럽다고 느껴지는 것까지야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러고 보니 사람만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있는 공간, 내가 하는 일, 모든 것들이 나로부터 빠져 나가간다. 사물들이 낯설게 보인다. 점점 눈이 멀어져가고, 귀가 멀어져 가는 것 같다. 모든 것들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그 중심에 내가 있다고 욕한다. 왜. 나도 모른다. 


영화 <피아노>는 20대의 미혼모 에이다(홀리 헌터 분)가 아홉살 난 사생아 딸을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를 찾아 뉴질랜드로 시집간다는 내용이다. 여기까지는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 같다. 뉴질랜드로 시집간 에이다는 남편 스튜어트에게는 몸을 주지 않고 그의 친구 베인스와 눈이 맞아 바람을 핀다는 뻔한 스토리다. 여기까지도 신문 사회면 기사를 채우는 가십꺼리다.

아, 여자들은 왜 바람을 피워, 열심히 사는 남편은 어쩌라구. 궁시렁 궁시렁. 자기 마누라가 바람피는 걸 눈치 챈 스튜어트는 에이다의 검지 손가락을 싹뚝 자르고 만다. 아 놔, 그렇게 될 줄 알았지, 불륜은 언제나 붕어빵이단 말이야.

손가락을 짤린 에이다는 베인스와 영국으로 망명(?) 뱃길에 오른다. 이것이 대충 <피아노>의 줄거리다. 다 말해 버리면 어떡해? 괜찮아. 이 영화 안 본 사람도 거의 없을 거고, 안봤다 해도 줄거리를 알고 봐도 재미있는 영화니까.


오늘 같은 날 왜 <피아노>가 생각날까. 궁상맞은 내 처지를 내려다 보면, <피아노>의 에이다가 떠오른다. 내가 '블로그'를 통하여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한다면, 에이다가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피아노'였다. 그녀는 어찌된 일인지 여설살때부터 말을 잃어버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특출한 재능때문에 말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럴수도 있겠지, 세상에는 없는 일이 없으니까. 말을 잃은 이후 그녀는 피아노와만 세상과 소통하며 자랐다. 피아노는 그녀의 욕망이 분출하고 표현되는 유일한 창구다. 피아노를 칠 때, 그녀는 행복한 표정이다. 그녀에게 그토록 소중한 의미를 그녀말고 누가 알까.

거친 파도를 헤치며 뉴질랜드 해안가에 도착한 에이다는 해변가에서 그녀의 속옥치마를 벗어서 텐트삼아 하룻밤을 딸아이와 지낸다. 그 잘난 남편이 하루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스튜어트는 매우 합리적인 중년의 남자로 등장한다.

피아노가 무거우니 해변가에 그냥 버리고 간다. 에이다의 모든 것, 그녀의 욕망이 깊은 공명으로 울리는 피아노, 그녀의 현란한 손놀림을 유일하게 받아주는 그 피아노를 버리고 간다!

멋있는 스튜어트, 그러나 그에게 로맨틱은 없었다. 일만 하는 남자들이여, 조심할 지어다.

               
해변가에서 스튜어트의 집까지는 원시림의 수풀을 지나야하고, 질척거리는 늪지대를 지나야 하니 피아노를 인력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사람도 겨우 겨우 지나가는 원시림이 아니던가.

피아노는 이제 해변가에 버려지서 낮과 밤을 보낼 것다. 평론가들은 뭐 피아노가 에이다의 얼터에고니 무의식의 응결이니 떠들어대도 그냥 에이다의 분신이라고 쉽게 생각하면 된다. 피아노의 음은 확실히 에로틱하지만 물신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곤란하다. 피아노피아노일 뿐이다.

피아노를 버리고 온 남편 스튜어트에 대한 에이다의 분노는 대단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에이다 역을 연기한 홀리 헌터의 카리스마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그녀는 제 6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비롯 각종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어 버렸다.

남편은 기가 찼다. 얼굴은 그런대로 봐줄만 하지만, 왜소한 체구라고 궁시렁거리던 남편은 분노에 찬 그녀의 행동을 보고 그녀를 정신에 문제가 이상이 있는 여자로 치부해 버린다. 이왕 안될거면 빨리 포기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다. 스튜어트는 땅을 사모으는 근면 성실한 중년남자답게 포기가 빨랐다. 

하비 케이텔을 우섭게 보지 마!

                                                  
자기의 분신인 피아노를 거친 풍랑이 휘몰아치는 해변가에 두고 온 에이다는 남편의 친구 베인스를 꼬드껴 해변가에 피아노를 치러 간다. 파도치는 해변가에서 격정적으로 피아노를 치는 에이다의 모습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에이다에게 넘어간 베인스는 스튜어트에게 땅 80에이커를 줄테니 피아노를 자기한테 팔라고 한다. 피아노 한대 값이 땅 십이만평라니.

이 남자, 문신까지 새긴 이 무식한 남자, 너 실수하는 거 아냐? 아무리 땅이 지천으로 널린 뉴질랜드라도 너무한거 아냐? 아무리 명품 피아노라도 그렇치... 합리적인 스튜어트는 얼씨구, 피아노에도 글도 모르는 베인스를 위해 마누라더러 피아노 교습까지 부쳐 준다.

아뿔사, 스튜어트도 실수하는 구나. 남자 여자가 붙어 있으면 뻔한거 아냐. 아무리 베인스가 무식하고 못생겼더라도.....

베인스는 피아노 치는 에이다의 목덜미를 보고 욕정을 느낀다. 뒷덜미 관리를 잘하자!

                  
베인스 집으로 피아노 교습을 다니던 에이다는 결국 베인스에게 몸을 허락한다. 저런, 그렇게 될 줄 알았지만, <피아노>의 감독 제인 캠피온은 그 넘어가는 과정을 전혀 천박하지 않게 예술적으로 그려낸다.

그것도 베인즈 역을 맡은 하비 키이텔의 성기 노출까지 했는데도 너무 자연스럽다. 무식해 보이던 베인즈의 얼굴조차 멋지게 보인다. 벙어리 에이다 마저도 너무 색감적으로 보인다.

아, 이게 바로 영화의 힘이다. 불륜일지라도 아름답게 만드는 힘,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영화 <피아노>에는 아름다운 성기노출은 물론 뉴질랜드의 원시림의 풍광과 마우리족의 풍습까지 멋지게 카메라에 담는데 성공했다.

깐느는 뉴질랜드 출신의 이 주목받는 여류 감독 제인 캠피언에게 그랑프리를 수여한다. 이만하면 받을 만 하지. 인정한다.

피아노 치는 에이다의 반쯤 가려진 손가락을 보라. 얼마나 관능적인가.

                         
불륜의 현장을 몰래 본 스튜어트 이 남편, 역시 냉정을 잃지 않는다. 그러나 어째 좀 궁상맞다. 아무리 합리적이지만 마누라를 용서하고 그대로 주저 앉아 살려고 하다니. 그러나 그게 어디 될 일이더냐. 여자가 사랑에 빠지면, 눈에 뵈는게 없는 법.

에이다는 베인스를 위하여 자기 생명같은 피아노 건반을 빼내어 사랑의 시를 적어 보낸다. 세상과 단절되었던 여인이 사랑을 시작하면 얼마나 매섭게 하는 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랑하는 그대, 에이다는 오직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이 글귀가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뭐 그런 내용이다. 난 오르지 당신거라는 말, 아, 사랑은 그런 거다. 빠지면 오직 한 사람만 보인다. 그걸 두고 우리는 불멸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피아노는 건반 한개를 빼내면 피아노는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한다. 이제 에이다는 피아노 없이도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피아노 없이도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여자가 된 것이다.

사랑을 선택한 그녀 앞에는 모진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사랑인데. 손가락 짤림도, 자살 충동도 이겨내는 것이 사랑 아니던가. 베인스, 온 좋은 놈, 그렇게 맹목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자를 알아보다니, 십만평이면 어떻고, 백만평이면 어떠랴. 이 남자, 장사 제대로 했다. 퇴근길이 멀다. 그만하자. 벌써 11월이다.

영화정보
제목 피아노 The piano
장르 로맨스/멜로 |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뉴질랜드 | 121 분 | 1993-09-25 | 18세가
감독 제인 캠피온
배우 홀리 헌터 (아다 역) 하비 케이텔 (베인즈 역) 샘 닐 (스튜어트 역)
평점 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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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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