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존재 이전에 말하고 듣는 존재이다. 상대방에게 말할 것이 없을 때, 상대방으로부터 들을 것이 없을 때 소통은 단절된다. 인간은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의 말이 상대방으로부터 이해되지 않는다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세상이 불현듯 불안으로 흔들리며 미끄러질 때, 말하고 들을 수 없음이 전면에 나타나며 겪게 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이해될 수 있는 말을 얼마나 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말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인간의 소통의 문제를 일상의 근저에서 탐구한 작품이 데니스 일리아디스 감독의 <하드코어>다.
16살 나디아(카트리나 슬라블로 분)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탈출하고 싶어 부모가 잠든 사이 집에 불을 질러 가출하여 매춘부가 된다.
매음굴에서 욕정에 굶주린 남자들에게 몸을 판 댓가로 돈과 마약에 의지해 산다. 그리고 듣고 싶은 CD 한장을 손에 넣기 위해 스스럼 없이 몸을 준다. 매음굴에서 만난 마티아(다냐 스키아디 분)가 어쩔 수 없이 매춘부가 되었다면, 나디아는 <하드코어> 자체를 즐기는 어린 소녀이다.
섹스와 폭력과 마약에 몸을 내던진 10대 소녀 나디아는 세상과의 소통의 방편으로써 그녀의 몸을 활짝 벌린다.
그리고 <하드코어>에는 매음굴 안에서의 소통방식을 암시한다. 나디아와 마티아는 같은 업소에서 일하는 남성, 게이들과 섹스를 한다. 남성들도 단지 매음굴에서 몸을 팔 뿐이다.
이들의 소통방식은 철저하게 <하드코어>적이다. 이들의 행위는 말하고 듣는 존재라는 근원에 대하여 저항하는 듯 하다. 그녀들에겐 세상이 구토스럽게 다가온다.
실존철학의 견해를 따르자면, "각 인간은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처럼 존재한다. 사람은 오직 똑같은 양식으로 사회적인 가능성, 생계, 노동 및 향락에 참여하여야 하는 하나의 표본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회적인 그로서 그는 모든 다른 사람처럼 된다.
생각이 없는 현존재 속에서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을 그도 하며, 모든 사람이 믿는 것을 그도 믿고, 모든 사람이 사고하는 것을 그도 사고 한다. 의견, 목적, 불안, 기쁨들은 어떤 한 사람으로부터 어떤 다른 사람으로 옮아 간다.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그리고 자명하게 같은 것으로 되어 버리는 까닭에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개별자는 일상적인 현존재 속에서 그 자신의 자유로운, 책임있는 결단으로부터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파악되지 않는, 그리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영향에 의하여 몰려 이끌리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며, 그는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한다.
이러한 '사람들'이라는 익명의 집합체 속에서 단독자의 모든 특수성은 편균화되어 있다. 모든 것은 눈에 안보이는, 그러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힘의 강제 밑에서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결코 그 자신이 아니고 인간 속에서 '세상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하드코어>의 나디아는 자신의 몸뚱아리에 쏟아지는 남자들의 질척한 시선을 즐기는 쾌락으로 존재할 수 있었으며, 마티아는 그런 나디아의 존재 양식을 따라 닮아 간다. 그들의 존재방식은 자기 자신과의 소통에 의한 것이 아닌, 다만 늘 곁에 있는 남자들과의 섹슈얼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해 간다.
그들의 세상에 대한 깊고 깊은 싫증은 현존재의 심연 속에서 아무 숨소리도 없는 안개처럼 이리저리로 떠돌면서 일체의 사물, 인간 및 그와 더불어 현존재 자신을 어떤 진기한 무관심 속으로 떠밀어 버린다.
어디 나디아 뿐이겠는가. 우리 주변에 서성이는 숱한 남과 여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처럼 존재할 뿐이다. 생각이 없는 인간들은 주변 사람들에 이끌려 생각하고 행동하며 몰려 다닌다.
그 자신의 자유로운, 책임있는 결단으로부터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던져진 채로 욕망할 뿐이다. 매춘부만이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처럼 존재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몸을 파는 것이나 진배없다.
연출과 각본을 겸한 데니스 일리아디스는 그리스 출신으로 광고계에서 이력을 쌓은 경력이 말해 주듯 <하드 코어>는 감각적인 편집 솜씨가 돋보이는 영화다. 하이데거의 표현대로라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 말이라는 거처에서 인간은 거주한다. 사색하는 철학자와 시 짓는 시인이 이 거처를 지키는 사람들이라면, 영화 감독은 그 언어에다 이미지를 합성하여 그 영상을 통하여 존재의 적나함을 드러내 보인다.
영화정보
제목 하드코어 Hardcore(평점 5.0)
장르 범죄, 드라마 | 그리스 | 96분 | 2007. 11. 23 | 18세관람가
감독 데니스 일리아디스
배우 카트리나 슬라블로(나디아), 다냐 스키아디(마티아)
RE 2008.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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