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Archive»


예술가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대부분 영화라는 장르와 잘 어울린다. 

실존인물은 물론이고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예술가들의 세계를 조명한 작품들은 외견상 영화라는 표현예술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시각적인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상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에 음악가를 담아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벙어리 아다(홀리 헌터 분)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피아노>는 예술가를 소재로 한 좋은 예다. 물론 아다는 실존 인물도 아니고 예술가로까지 보는데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술가의 욕망을 훔쳐볼 수 있는 영화다. 피아노를 소재로 한 또 한편의 영화 <피아니스트>도 예술가의 깊은 욕망을 조명한 영화다. 

이처럼 예술가 중에서 피아니스트가 종종 영화에 등장하는 이유는 예술가의 욕정을 가감없이 포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악기가 피아노이기 때문이다.

피아노만큼 손가락을 역동하는 리듬미컬로 분주하게 사용할 것을 요구하는 악기도 드물다. 화면 가득 가느다란 손가락의 섬세한 율동을 보는 것은 매혹적인 경험이다. 손은 동서고금을 막록하고 남녀간의 육체관계를 상징한다.


손가락은 성적흥분 상태, 혹은 남녀간의 육체관계를 상징하는데 자주 사용된다. 그 손가락을 빈번하게 사용하는 음악이 바로 피아노이다. 피아니스트들에겐 피아노가 페티쉬로 작용한다.

페티쉬란 생명없는 무생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뜻하는 일종의 정신과적 질환인데, 이를 예술가적인 경지로 승화한 것이 피아니스트들이다. 미카엘 하네게의 <피아니스트>는 이러한 피아니스트들의 숨은 욕망을 잘 표현한 영화다.

영화 <피아니스트>는 슈베르트와 슈만을 전공한 피아노 교수 에리카 코허트와 타고난 재능을 보이는 대학생 발터 클레머의 빗나간 사랑 이야기다.

사제간이라는 설정과 매저키즘적인 성애 묘사로 변태적 혹은 도착적 욕망이라는 수식어를 통해 주인공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지만, 섬세한 심리묘사와 함께 진행되는 촘촘한 내러티브의 전개는 이내 그런 불편함들을 잊게 한다.


주근께 가득한 무표정하고 차가운 얼굴의 피아니스트 에리카 코허트와 매력적인 대학생 발터 클레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부감으로 피아노를 치는 가나드란 손가락들의 현란한 율동을 보여주는 쇼트는 <피아니스트>에서 가장 빈번하게 화면을 가득 메운다.

이러한 교차 화면 편집들은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들과 그 미세한 변화를 관객들의 욕망으로 진입하는 영화적 장치들이다.

그리고 에리카와 발터 클레머를 매개하는 피아노 음은 그들의 욕망이자 관객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슈만과 슈베르트로 대표되는 음은 에리카의 욕동이자 관객의 욕망으로 작용한다. 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듣고자 하거나 들려지기를 욕망하는 소리에 의해 존재한다.

에리카는 섹스샵에서 비디오를 보며 누군가가 버린 휴지에서 정액의 냄새를 맡고, 자동차 극장에서 자동차 안 타자들의 정사 신음소리를 들으며 소변을 배출함으로써 오르가즘을 느끼는 행위는, 그녀의 페티쉬가 "소리"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소리의 가장 세밀한 부분가지 민감하게 잡아내는 에리카는 다른 섹스 행위에서는 성적쾌락을 얻을 수가 없다. 처녀로써 사십대를 살고 있는 에리카는 아직도 엄마와 한 침대를 쓰고 있으며, 침대 저 밑바닥 구석에는 성적 유희를 위한 자위도구를 숨겨두고 욕실에서는 자위행위로 성기를 면도칼로 긋고 다리로 흘러내리는 피를 엄마 앞에서 감추지 않는 소녀로서 남아있을 뿐이다.


<피아니스트>는 이러한 다자란 소녀의 심리상황과 변화, 욕망의 파편들을 시각 이미지로 충실하게 전달한다. 결벽에 가까운 갈끔한 헤어스타일과 화장하지 않는 생얼은 물론, 정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엄숙한 연습실은 에리카의 숨겨진 욕동을 역설한다.

길을 걷다 누군가와 스쳐 부딪힌 옷깃을 털어내는 결벽증적 행위와 섹스샵에서 양아치들이 버렸을 법한 휴지를 코에 가져다 대는 상반된 행위는 그녀의 억압된 욕망을 대비시킨다.

 에리카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페티쉬로써 작동하고 그 페티쉬에서 흘러나오는 음은 성적쾌락을 작동시킨다. 연주곡이 하나씩 바뀔 때마다 카메라는 에리카에 근접해가며 그녀의 미동하는 얼굴 표정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그녀에게 있어 피아노와 소리는 그녀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욕망을 대변한다. 그런 그녀에게 클레머와의 사랑은 처음부터 접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클레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달라고 애원하는 에리카의 손짓은 예술가로서의 고독한 영혼, 혹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을 수 밖에 존재감을 잘 드러낸다.

클레머는 단지 타고난 연주가일 뿐이며 피아노로부터 또는 소리로부터 어떤 욕동을 받지도 않는 평범한 대학생일 뿐이다. 클레머는 성도착적인 증세를 보이는 에리카를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에리카 또한 그녀의 삶이 그랬듯이 클레머라는 남자를 통해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없을 수 없다. 에리카의 피학적 욕망을 수용하지 못하는클레머는 말 그대로 "폭력"으로 에리카를 공격했을 뿐이다.

그녀의 청을 거절한 클레머를 뒤로 두고 칼로 자신의 가슴을 자해하여 피를 흘리며 콘서트홀로부터 걸어 나오는 라스트 씬은 콘스홀의 밝은 불빛을 배경으로 하여 그녀 삶이 귀결되는 종착점을 잘 드러낸다.

결국 에리카는 흑백으로 대비되는 피아노를 통하여 음정을 조절하며 자신의 음계를 잡아 나가야 한다.


영화정보
원제 The Piano Teacher, La Pianiste
장르 드라마 | 프랑스, 오스트리아 | 129분 | 2002.12. 20 | 18세 관람가
감독 미카엘 하네케
배우 이자벨 위페르(에리카), 브누와 마지멜(클레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