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의 부친이 일제시대에 잔혹한 행위를 한 친일파 경찰이었다면, 당신은 부친을 고발할 수 있을 것인가. 참 어려운 질문이다. 이러한 사회정의라는 대의와 가족에 대한 사랑 사이의 고뇌를 다룬 영화가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뮤직 박스>(1989)이다.

<제트>(1969), <계엄령>(1973), <아멘>(2002) 등 주로 정치색 짙은 영화를 일관되게 만들어 온 코스타 가브라스는 정치영화의 대가답게 <뮤직 박스>를 통하여 고통스럽겠지만 역사적 진실은 (후세대를 위해서라도)그냥 묻어두고 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대의와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앤 역은 제시카 랭이 연기했는데, 이 영화에서 랭은 <킹콩>(1976)을 유혹하던 늘씬한 미녀에서 어느새 세월이 십수년 흘러 역사와 아버지를 염려하는 사려 깊은 중년여인으로 돌아왔다.

헝가리에서 이민 온 라즐로(아민 뮬러-스탈)는 일리노이에서 철강노동자로 일하다 성공한 변호사 딸 앤과 손자,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던 아들과 화목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어느 날 법원으로부터 라즐로가 나치 비밀경찰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전범으로 고발되었다는 통지를 받는다.

라즐로는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을 체포하기 위하여 조작한 것이라며 강하게 부인하고, 앤도 자식들을 힘겹게 키워온 자신의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한다. <샤인>(1996)에서 억척스럽게 아들을 피아니스트로 키워낸 아민 뮬러-스탈은 이 영화에서도 딸을 변호사로 키워낸 확고부동한 부정을 보여준다.


심리과정에서 라즐로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짐승 같은 잔혹한 학대를 유대인들에게 행했음이 밝혀지지만, 앤의 눈부신 변호로 라즐로는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 받는다. 버크 검사(프레드릭 포레스트)와 앤 변호사의 공방이 법정드라마로서의 진수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증인이 입원으로 법원에 출석하지 못하자 헝가리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병실에서 판사가 심리를 진행하는 모습은 매우 흥미롭게 보인다. 실제로도 저렇게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정말 존경할만한 법조인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실력 좋은 변호사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과는 무관하게 무죄를 이끌어낸다는 것이다. 공방 때마다 앤과 라즐로의 클로즈업된 당혹스런 표정들은 소송제도의 맹점을 꼬집는 장면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코스타 가브라스는 <뮤직 박스>를 통하여 진실을 기꺼이 드러낸다. 앤이 사랑하는 아버지이지만, 앤 또한 역사 앞에 자유로울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앤이 낡은 뮤직박스를 열자 멜로디와 함께 라즐로가 학살에 가담한 사실이 분명해 보이는 흑백 사진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진실은 고개를 내민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영화의 라스트신은 매우 감동적이고 애절하다. 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정원의 밴치에서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을 감싸 앉은 앤의 뒷모습은 오래된 과거사로 아버지를 단죄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긴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는 제40회 베를린국제영화제(1990년)에서 체코 영화 <줄 위의 종달새>와 공동으로 그랑프리인 금곰상을 수상했고 제시카 랭은 제62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제목
뮤직 박스 Music Box, 1989(평점 8.0)
장르 드라마 | 미국 | 125 분 | 개봉 1990.02.24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
배우 제시카 랭(앤 탈봇), 아민 뮬러-스탈(마이크 라즐로), 프레드릭 포레스트 (잭 버크), 도날드 모팻(해리 탈봇), 마이클 루커(카시 라즐로), 루카스 하스(미키 탈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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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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